INTERFERENZE
2026-27 가을/겨울
팔라초 바르베리니(Palazzo Barberini)는 평온한 건축물이 아니다. 이 공간은 형식이 주장하는 안정성에 의문을 제기하도록 여러 장치들이 맞물려 작동하는 긴장의 공간이다. 질서와 움직임 사이의 어떠한 합성도 거부하며, 그 둘의 강요된 공존, 지속되는 마찰, 그리고 서로가 겹쳐질 때 발생하는 간섭을 그대로 드러낸다. 니체(Nietzsche)의 관점에서 보면, 이 팔라초는 측정, 명료성, 위계에 의해 규정되는 아폴론적 원리와 도취, 표류, 경계의 해체로 이루어진 디오니소스적 충동 사이의 해결되지 않은 긴장이 자리한 장소로 자신을 드러낸다.
언뜻 보면 팔라초는 견고하며 규칙적으로 보이며, 대칭적이고 명료한 구성의 질서에 의해 지배되는 것처럼 보인다. 비록 바로 크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이 건축적 유기체는 공간을 지탱하고,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정돈된 골격과 구성적 균형을 강조하고 있다. 건물의 정면, 안뜰, 층계가 만들어내는 리듬감의 반복은 모든 요소가 정밀한 위계 속에서 제자리를 찾는 원근 법적 장치로 작동하는 체계를 구축한다. 여기서 건축은 지속성, 측정, 견고함을 주장한다. 그러나 내부에서는 원심적 힘들이 규 칙적인 형식성을 찢으며, 조밀함을 갈라지게 한다. 그레이트 홀에는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Pietro da Cortona)의 신성한 섭 리가 폭발하듯이 등장해 그 기하학적인 엄격함을 산산이 깨뜨린다. 천장은 환영적인 격변을 거쳐 해체되며, 열리고 비물질화된다. 하늘이 건축을 뒤흔들고, 자연은 그 아래에 놓은 직교적 체계를 해체하며, 빛과 바람은 통제된 공간 깊숙이 스며든다. 규칙 적인 평면 위에서는 소용돌이 치면서, 상승하는 대기적인 움직임이 펼쳐진다. 이로써 하나의 구조적인 마찰이 형성된다. 한쪽 에는 위계적 사고를 계승한 건축적 안정성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경계를 파괴하고 천장을 하나의 사건으로 변모시키는 회화적 환영이 있다. 이곳에서 삶은—독일의 철학자 게오르크 짐멜(Georg Simmel)의 말처럼—자신을 담고 있는 형식을 초과하며, 그 형식은 결국 자신의 불충분함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
서로 대립하는 힘들 사이의 이러한 변증법적인 관계는, 같은 건축물에 참여했음에도, 정반대의 공간적인 구상을 구현했던 건축 가 지안 로렌조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와 건축가 프란체스코 보로미니(Francesco Borromini)의 대결에서 특 히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그들의 대화 혹은 충돌 안에서 건축은 질서와 불안정성이 해결되는 곳이 아니라, 형식의 물질성 안에 서 끊임없이 서로를 측정하고 맞서는 장으로 나타난다.
베르니니의 계단은 위계성과 방향성을 투명한 기하학으로 명료하게 드러낸다. 신체는 안내되고, 경로는 명확하며, 상승하는 움 직임은 자연스럽게 제시되는 기하학적인 원리와 일치한다. 공간은 하나의 안전 장치로서 기능한다. 안심시키며, 훈련시키며, 힘을 가시적이면서도 측정 가능하게 만든다. 베르니니의 계단은 확인의 메커니즘이다. 광대하고, 직선적이며, 장엄하다. 걸음 은 통제되고, 리듬은 예측 가능하다. 신체는 규율된다. ‘오른다’는 것은 위계를 따르고, 명확한 방향성을 인정하며, 중심성을 수 용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규율은 협상되지 않는다. 질서는 우아하게 부과된다. 반면, 보로미니의 타원형 계단은 신체를 동반하 는 것이 아니라, 방향 감각의 상실 속으로 노출시킨다. 기하학은 휘어지고, 수직성은 불안정한 경험이 된다. 움직임은 더 이상 직선이 아니라 비틀림, 표류, 끊임없는 적응이다. 이 공간은 안정화하지 않는다. 엄격함은 내부로부터 균열되고, 형식은 지속되 지만 더 이상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 ‘오른다’는 것은 자신만의 균형을 끊임없이 협상하며, 이동하는 중심성을 받아들이고, 불 안정하게 변화하는 구성 속에서 스스로를 자리 잡는 일이다. 여기에서 건축은 단언하지 않고 질문한다.
정확히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순간에, 팔라초는 자신의 가장 깊은 본성을 드러낸다. 이는 하나의 통합된 유기체가 아니라 서로 상충하는 힘들이 서로를 소멸시키지 않은 채 공존하는 간섭(Interference)의 장이다. 이곳은 긴장들, 여러 겹의 의지들, 물질 속에서 스스로를 측정하는 비전들이 거주하는 공간이다. 무엇이 공간을 인도하고, 무엇이 그 틀을 깨뜨리는지—이 두 힘은 동 일한 둘레, 동일한 표현적 야심 안에서 공존할 수 있으며, 이 공존 자체가 밀도를 만들어낸다. 규율하는 직선성과 방향 감각을흔드는 곡선은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둘이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어떤 공간은 하나의 문법으로 환원되기를 거부하는장소가 된다. 철학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변증법적 이미지들이 그러하듯, 진리는 통합에서 탄생하는 것이 아니 라, 서로 대립하는 극들을 붙잡아 둘 때 생성되는 불꽃에서 드러난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패션 또한 신체 안과 밖에서 공존하는 대립적인 힘들의 장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의복은 단순한 장식적 인 표면이 아니다. 이는 규율과 욕망, 사회적인 규범과 개인적인 제스처, 소속과 초과 사이의 대화를 조직하는 장치이다. 사진 가 브래들리 퀸 (Bradley Quinn)이 말했듯이, 패션과 건축은 단순히 형식적으로 닮아 있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작동 논리를 공유한다. 둘 다 공간을 구조화하고, 정체성을 향하게 한다. 의복이 신체에 근접한 공간을 구성하듯, 건축은 거주 가능한 환경 을 구성한다. 이 둘은 모두 주체의 현존 조건, 즉 신체가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 움직이는 방식, 바라보이는 방식에 간섭할 수 있 는 긴장의 장에 대하여 형식을 부여한다.
건축과 같이 패션도 안정시키면서도 불안정하게 만들고, 방향을 제시하면서도 중심을 분산시키며, 단언하면서도 질문한다. 패 션은 위계를 가시화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전복할 수도 있다. 의복의 형태는 구조와 움직임, 중력과 부상, 통제와 개방성 사이 의 끊임없는 협상의 결과물이다. 이러한 마찰 속에서 옷을 입는 행동은 사유의 밀도를 획득한다. 그것은 단순히 어떤 규범을 따 르는 것이 아니라, 미학적, 상징적, 사회적인 힘이 스스로를 드러내고 스스로를 질문하는 역동적 공간이 된다. 의복의 구성은, 건축물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코드와 발명, 기억과 변형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협상의 잠정적 결과다. 모든 창조적 제스처는 자 신에 앞서 존재하는 전통과 맞서게 되며, 이 대면은 기존의 규범적 구조를 흔들 수 있는 일탈의 가능성을 연다. 의미는 어느 한 극이 다른 극을 이겨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양극이 함께 붙잡혀 있을 때 발생한다. 이 불안정한 균형이 형식을 끊임없이 작 동하는 힘의 장, 열려 있는 ‘간섭’의 체계로 만든다.
이와 같은 점에서 팔라초 바르베리니는 패션쇼를 위한 이상적인 무대가 된다. 건축과 패션이 잊을 수 없도록 엄격과 일탈 사 이의 본질적인 마찰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 유사성은 미적 차원에서도 단순한 형식적 반복에서도 비롯되지 않는다. 아폴론 적 원리와 디오니소스적 원리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두 언어 내부에서 동시에 작동하는 극적 구조를 인식하는 데서 생 겨난다. 팔라초 바르베리니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그것은 비판적 재활성화를 위한 장치이다. 건물은 몸들을 수용하는 데 그 치지 않고, 그들을 요구하고, 방향을 제시하며, 드러내고, 위계와 비틀림, 축과 곡선으로 이어지는 역사와의 대면을 강제한다. 돌과 직물을 관통하는 이러한 긴장 속에서, 인터페렌체(Interferenze) 패션쇼는 코드와 일탈, 가벼움과 무거움, 규칙과 과잉, 투명성과 불투명, 순응과 위반이 충돌하는 순간을 드러낸다. 그 결과로 등장하는 컬렉션은 질서를 기념하면서도 동시에 그 구 조적 취약성을 드러내며,질서가 스스로를 극복하는 가능성 앞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Alessand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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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라초 바르베리니(Palazzo Barberini)는 평온한 건축물이 아니다. 이 공간은 형식이 주장하는 안정성에 의문을 제기하도록 여러 장치들이 맞물려 작동하는 긴장의 공간이다. 질서와 움직임 사이의 어떠한 합성도 거부하며, 그 둘의 강요된 공존, 지속되는 마찰, 그리고 서로가 겹쳐질 때 발생하는 간섭을 그대로 드러낸다. 니체(Nietzsche)의 관점에서 보면, 이 팔라초는 측정, 명료성, 위계에 의해 규정되는 아폴론적 원리와 도취, 표류, 경계의 해체로 이루어진 디오니소스적 충동 사이의 해결되지 않은 긴장이 자리한 장소로 자신을 드러낸다.
언뜻 보면 팔라초는 견고하며 규칙적으로 보이며, 대칭적이고 명료한 구성의 질서에 의해 지배되는 것처럼 보인다. 비록 바로 크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이 건축적 유기체는 공간을 지탱하고,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정돈된 골격과 구성적 균형을 강조하고 있다. 건물의 정면, 안뜰, 층계가 만들어내는 리듬감의 반복은 모든 요소가 정밀한 위계 속에서 제자리를 찾는 원근 법적 장치로 작동하는 체계를 구축한다. 여기서 건축은 지속성, 측정, 견고함을 주장한다. 그러나 내부에서는 원심적 힘들이 규 칙적인 형식성을 찢으며, 조밀함을 갈라지게 한다. 그레이트 홀에는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Pietro da Cortona)의 신성한 섭 리가 폭발하듯이 등장해 그 기하학적인 엄격함을 산산이 깨뜨린다. 천장은 환영적인 격변을 거쳐 해체되며, 열리고 비물질화된다. 하늘이 건축을 뒤흔들고, 자연은 그 아래에 놓은 직교적 체계를 해체하며, 빛과 바람은 통제된 공간 깊숙이 스며든다. 규칙 적인 평면 위에서는 소용돌이 치면서, 상승하는 대기적인 움직임이 펼쳐진다. 이로써 하나의 구조적인 마찰이 형성된다. 한쪽 에는 위계적 사고를 계승한 건축적 안정성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경계를 파괴하고 천장을 하나의 사건으로 변모시키는 회화적 환영이 있다. 이곳에서 삶은—독일의 철학자 게오르크 짐멜(Georg Simmel)의 말처럼—자신을 담고 있는 형식을 초과하며, 그 형식은 결국 자신의 불충분함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
서로 대립하는 힘들 사이의 이러한 변증법적인 관계는, 같은 건축물에 참여했음에도, 정반대의 공간적인 구상을 구현했던 건축 가 지안 로렌조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와 건축가 프란체스코 보로미니(Francesco Borromini)의 대결에서 특 히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그들의 대화 혹은 충돌 안에서 건축은 질서와 불안정성이 해결되는 곳이 아니라, 형식의 물질성 안에 서 끊임없이 서로를 측정하고 맞서는 장으로 나타난다.
베르니니의 계단은 위계성과 방향성을 투명한 기하학으로 명료하게 드러낸다. 신체는 안내되고, 경로는 명확하며, 상승하는 움 직임은 자연스럽게 제시되는 기하학적인 원리와 일치한다. 공간은 하나의 안전 장치로서 기능한다. 안심시키며, 훈련시키며, 힘을 가시적이면서도 측정 가능하게 만든다. 베르니니의 계단은 확인의 메커니즘이다. 광대하고, 직선적이며, 장엄하다. 걸음 은 통제되고, 리듬은 예측 가능하다. 신체는 규율된다. ‘오른다’는 것은 위계를 따르고, 명확한 방향성을 인정하며, 중심성을 수 용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규율은 협상되지 않는다. 질서는 우아하게 부과된다. 반면, 보로미니의 타원형 계단은 신체를 동반하 는 것이 아니라, 방향 감각의 상실 속으로 노출시킨다. 기하학은 휘어지고, 수직성은 불안정한 경험이 된다. 움직임은 더 이상 직선이 아니라 비틀림, 표류, 끊임없는 적응이다. 이 공간은 안정화하지 않는다. 엄격함은 내부로부터 균열되고, 형식은 지속되 지만 더 이상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 ‘오른다’는 것은 자신만의 균형을 끊임없이 협상하며, 이동하는 중심성을 받아들이고, 불 안정하게 변화하는 구성 속에서 스스로를 자리 잡는 일이다. 여기에서 건축은 단언하지 않고 질문한다.
정확히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순간에, 팔라초는 자신의 가장 깊은 본성을 드러낸다. 이는 하나의 통합된 유기체가 아니라 서로 상충하는 힘들이 서로를 소멸시키지 않은 채 공존하는 간섭(Interference)의 장이다. 이곳은 긴장들, 여러 겹의 의지들, 물질 속에서 스스로를 측정하는 비전들이 거주하는 공간이다. 무엇이 공간을 인도하고, 무엇이 그 틀을 깨뜨리는지—이 두 힘은 동 일한 둘레, 동일한 표현적 야심 안에서 공존할 수 있으며, 이 공존 자체가 밀도를 만들어낸다. 규율하는 직선성과 방향 감각을흔드는 곡선은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둘이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어떤 공간은 하나의 문법으로 환원되기를 거부하는장소가 된다. 철학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변증법적 이미지들이 그러하듯, 진리는 통합에서 탄생하는 것이 아니 라, 서로 대립하는 극들을 붙잡아 둘 때 생성되는 불꽃에서 드러난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패션 또한 신체 안과 밖에서 공존하는 대립적인 힘들의 장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의복은 단순한 장식적 인 표면이 아니다. 이는 규율과 욕망, 사회적인 규범과 개인적인 제스처, 소속과 초과 사이의 대화를 조직하는 장치이다. 사진 가 브래들리 퀸 (Bradley Quinn)이 말했듯이, 패션과 건축은 단순히 형식적으로 닮아 있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작동 논리를 공유한다. 둘 다 공간을 구조화하고, 정체성을 향하게 한다. 의복이 신체에 근접한 공간을 구성하듯, 건축은 거주 가능한 환경 을 구성한다. 이 둘은 모두 주체의 현존 조건, 즉 신체가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 움직이는 방식, 바라보이는 방식에 간섭할 수 있 는 긴장의 장에 대하여 형식을 부여한다.
건축과 같이 패션도 안정시키면서도 불안정하게 만들고, 방향을 제시하면서도 중심을 분산시키며, 단언하면서도 질문한다. 패 션은 위계를 가시화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전복할 수도 있다. 의복의 형태는 구조와 움직임, 중력과 부상, 통제와 개방성 사이 의 끊임없는 협상의 결과물이다. 이러한 마찰 속에서 옷을 입는 행동은 사유의 밀도를 획득한다. 그것은 단순히 어떤 규범을 따 르는 것이 아니라, 미학적, 상징적, 사회적인 힘이 스스로를 드러내고 스스로를 질문하는 역동적 공간이 된다. 의복의 구성은, 건축물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코드와 발명, 기억과 변형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협상의 잠정적 결과다. 모든 창조적 제스처는 자 신에 앞서 존재하는 전통과 맞서게 되며, 이 대면은 기존의 규범적 구조를 흔들 수 있는 일탈의 가능성을 연다. 의미는 어느 한 극이 다른 극을 이겨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양극이 함께 붙잡혀 있을 때 발생한다. 이 불안정한 균형이 형식을 끊임없이 작 동하는 힘의 장, 열려 있는 ‘간섭’의 체계로 만든다.
이와 같은 점에서 팔라초 바르베리니는 패션쇼를 위한 이상적인 무대가 된다. 건축과 패션이 잊을 수 없도록 엄격과 일탈 사 이의 본질적인 마찰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 유사성은 미적 차원에서도 단순한 형식적 반복에서도 비롯되지 않는다. 아폴론 적 원리와 디오니소스적 원리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두 언어 내부에서 동시에 작동하는 극적 구조를 인식하는 데서 생 겨난다. 팔라초 바르베리니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그것은 비판적 재활성화를 위한 장치이다. 건물은 몸들을 수용하는 데 그 치지 않고, 그들을 요구하고, 방향을 제시하며, 드러내고, 위계와 비틀림, 축과 곡선으로 이어지는 역사와의 대면을 강제한다. 돌과 직물을 관통하는 이러한 긴장 속에서, 인터페렌체(Interferenze) 패션쇼는 코드와 일탈, 가벼움과 무거움, 규칙과 과잉, 투명성과 불투명, 순응과 위반이 충돌하는 순간을 드러낸다. 그 결과로 등장하는 컬렉션은 질서를 기념하면서도 동시에 그 구 조적 취약성을 드러내며,질서가 스스로를 극복하는 가능성 앞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Alessand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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